조선족 과학자 한경청 교수는 중국 통제리론분야의 거목이였다. 그는 평소 과학기술을 발전시W020110108517277274947.jpg 켜야 나라가 산다는 강한 신념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대교육과 민족과학자 양성에도 앞장섰다. 한경청 교수는 과학에만 관심이 머문것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선비였다. 한경청 교수의 끈질긴 분투와 정열적인 삶은 과학기술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삶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경청 교수는 2008년 4월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 며칠전까지도 연구소와 작업장을 떠나지 않은 학자로도 유명하다. “꾸준한 노력과 끈질긴 분투”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에게 이러한 연구습관은 어찌 보면 당연한것이였다. 200여편의 론문과 8권의 과학저서 그리고 그가 완성한 10여가지 부급이상 과학기술연구 프로젝트는 이러한 성실함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한경청 교수는 1937년 압록강변 장백현의 무서운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사람만 50여가구 사는 이 마을에는 학교라곤 아버지가 꾸린 온돌방학교뿐이였다. 아버지는 그의 호기심을 억압하지 않고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었으며 자립심과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역경을 극복하고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아버지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던것이다.

    한경청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한테서 엄한 훈도를 받았는데 이때 자주 들은 말이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倒 何事不成)”이라는 가훈이였다. 쏘련류학시절 그는 가훈을 “꾸준한 노력과 끈질긴 분투”로 번역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어린 시절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였고 무엇이든 정확하고 꼼꼼하게 해내는 한경청은 3년만에 소학교 학과과정을 다 떼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백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집을 떠나 장백현 시내에 있는 고모 댁에서 1년간 다니다가 고모 댁의 어려운 사정으로 학교를 중단했다.

    풀 향기와 쇠똥냄새, 이웃의 밥짓는 연기, 꼬리를 흔들며 짖는 삽살개와 하루종일 노니는 아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한경청 교수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학교로 찾아갔다. 때마침 학교에서 보조금을 받으며 공부하던 한 학생이 전학하는 바람에 그 보조금을 받으며 공부할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였다.

    복학한지 얼마 안돼 한교수의 아버지는 해방전쟁에 나갔다가 뒤이어 항미원조에 나가게 되였다.게다가 어머니까지 극산병에 걸려 세상을 뜨다보니 그와 녀동생은 말할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되였다. 우는 녀동생을 큰집에 맡기고 학교로 떠나는 한경청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듯 아팠다. 공부를 해야만 가족의 미래를 바꿀수 있다는 절실함으로 중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장백현중학교 졸업에 이어 청원고중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학급의 애들보다 서너살이나 어린 한경청 교수는 하루 두끼씩 늘 굶기는 일쑤였지만 전쟁마당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큰 집에 맡겨둔 녀동생을 생각하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 고마운 분들도 많았다. 함께 공부하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 열심히 학문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그의 인간적 심성에 매료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경청 교수의 안해 배인순 녀사는 이렇게 회억한다.

    “장백에서 온 학생들중에 가장 곤난한 학생이 바로 우리 남편이였죠. 겨울에도 배삼바지 기운거 입고 신도 다른 사람이 내버린것을 신고, 그래도 공부만은 잘했습니다. 고마운 선생님들이 하도 보기가 안쓰러워 옷도 해주고… 이렇게 힘들게 공부했습니다.”

    중학교 친구 류형동 어르신은 이렇게 회고한다.

    “장백은 곤난한 곳입니다. 부모없이 자란 경청이는 참 힘들게 공부했습니다. 생활은 제일 곤난했지만 머리가 좋아서 계속 1등을 했죠. 천재입니다.”

    수학에 남다른 취미가 있는 한경청은 늘 철저한 예습과 복습을 하고 강의를 들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지긋이 들어붙어 풀어내고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있어서 수학문제 풀이는 심심하면 놀이삼아 하는 취미가 되였다.

    한경청은 또 독서를 즐겼다.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천문학 등 닥치는 대로 광범위하게 책을 읽었고 책속에서 수많은 위인을 만나며 미래를 그려보았다. 일부는 잘 리해가 되지 않아 읽고 또 읽었다. 긴 방학은 깊은 독서에 안성맞춤이였다.

    요즘 청소년들이 독서보다는 다른 매체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회가 달라지고 의사전달 방법이 변해도 가장 좋은 마음의 량식 제공자는 의연히 책이라고 생각한다. 력사적 명현들과 훌륭한 과학자들, 영웅들의 이야기는 항상 읽는 사람에게 큰 감동과 용기와 지혜를 준다.

    한교수가 수학박사의 꿈을 갖게 된것도 한권의 책과의 만남이였다. 어느날 학교 도서실에서 원쏘련의 20세 나젊은 수학박사에 관한 글을 읽게 되였다. 글은 소설보다도 더 큰 감격을 안겨주었고 과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스럽게 인식시켜주었다. 네댓번 더 읽으면서 “과학이라는것이 참 재미있고 수학박사가 되여 새로운것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막연하지만 수학박사로 되려는 꿈을 갖게 되였다.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수학에 평생을 던져볼만 하다는 생각으로 한경청은 1954년에 길림대학 수학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4년동안 다른 학생들처럼 놀거나 공원에 가는 대신 책방을 뒤졌고, 오락장소에 가는 대신 외국 명문대학의 책자를 구해 읽으며 그속의 련습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1958년 20세 어린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꿈에도 그려보았던 중국과학원 수학연구소에 배치받았다.

    사람들은 중국과학원을 과학자들을 키워내는 요람이고 과학자를 꿈꾸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흡인하는 희망봉이고 전당이라고 한다. 이제 20세밖에 안되는 한경청 교수는 이 과학전당에 들어선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은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의 보조금과 수많은 고마운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수 없다면서 수십년동안 은혜를 잊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 어린 시절 워낙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여건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해 그들이 미래를 바꾸도록 도와주었다.

    한경청 교수의 안해 배인순 녀사는 이렇게 회억한다.

    “애들이 힘들때 조금이라도 도와주어 그 애의 인생을 개변할수 있다면 이게 최대의 행복이 아니겠는가고 말씀했죠. 그래서 장백의 산골아이 10명에게 15년동안 계속 장학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서 학교 다니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애심장학금을 세웠죠. 이렇게 량쪽으로 후원하다보니 내 로임만 갖고 생활하다싶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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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라경 교수와 함께

    한경청 교수가 방금 입소했을 때는 마침 중국땅을 뒤흔들던 대약진시기였다. 입소하자 마자 연구소에서는 지식인들을 로동단련부터 시킨다며 중국과학기술대학 공장에 보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맛본 그에게 있어서 로동단련이란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러던 중에 방금 설립된 과학기술대학에 수학교원이 부족하여 조교로 될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였다. 그것도 저명한 수학가 화라경 교수의 조교로 말이다.

    화라경 교수의 조교로 된다는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화라경 교수가 강의원고를 쓰면 거기에 맞는 련습문제를 내고 학생들의 숙제도 검사했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보냈다. 화라경 교수는 이처럼 좋다궂다 소리없이 꾸준히 일하는 나어린 조교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는 틈만 있으면 한교수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주면서 풀어보라고 했고 손수 지도도 해주었다. 한교수가 해제의 기본줄거리를 이야기하면 화라경 교수는 만족스레 머리를 끄덕이며 얼굴에 흐뭇한 표정을 담군했다. 화라경 교수는 많은 조교가운데서 한경청 교수가 제일이였다고 칭찬했다.

    조교로 있는 동안 한경청 교수는 짬짬이 시간을 리용해 <대수방법으로 다항식안정성을 판단하기>란 론문을 써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그가 과학연구에서 거둔 첫 수확이다. 새우잠을 자며 고생을 하면서도 그때 처음으로 자신만이 느낄수 있는 창조의 기쁨, 성취의 쾌감을 느껴보았다.

    조교생활을 마치고 배치받은 연구실은 미분방정연구실이였다. 누구든지 배치받아 오면 필수과목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대학 뻬뜨롭쓰끼 교장이 쓴 저서 <상미분방정강의>였다. 이 책에서 유명한것은 바로 련습문제이다. 여태까지 배치받아 온 사람치고 련습문제를 전부 풀어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책상에 마주앉으면 일어설줄 모르고 밤이 깊어도 밤가는 줄 모르는 한경청은 놀라운 실력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내 연구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1962년 초, 세계적 현대통제리론의 발전에 따라 중국 미사일 연구에서의 대부인 전학삼 교수의 발기하에 수학연구소는 국방봉사를 취지로 한 <통제리론연구실>을 설립했다. 입소한지 4년도 안되는 한경청 교수는 기타 7명의 성원과 함께 연구진으로 선발되여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새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계통연구소의 발족이며 이때로부터 중국에는 통제리론이 정립되게 되였다.

    당시 한경청 교수와 통제리론연구실 부주임이였던 송건 교수가 공동으로 완성한 론문 <최속통제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종합>은 1963년에 있은 제2차 통제련합회의에서 국내외 학자들로부터 “최적화 통제리론에 대한 중요한 기여”라는 절찬을 받았다. 국외 과학기술잡지들에서도 론문의 특수성과 중국과학기술 잠재력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일년 남짓한 협작연구 과정에 한경청 교수와 송건 교수는 절친한 친구로 되였으며 송건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신중한 태도는 한경청 교수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훗날 자신있게 실험에 림할수 있었던것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열악한 기구를 가지고도 어떻게 하면 오차를 줄이며 분석할수 있는가를 철저히 가르쳐준 송건 교수의 덕분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1963년 한경청 교수는 과학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중국과학원에서 추천하는 류학생으로 3년간 유명한 모스크바대학 수학력학 학부에서 저명한 수학가 네메츠끼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을 전공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당시 모스크바대학에는 저명한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어 리상적인 연구요람이라 할 만했다. 한경청 교수는 기숙사와 강의실 그리고 연구실을 다람쥐 체바퀴 돌듯 맴돌며 바삐 보냈다.

    그는 13개월이란 짧은 시간을 리용해 상미분방정과 범함분석, 최적통제 등 세개 학과의 여러 저작을 독학하고 이 세 학과시험에 순조롭게 통과되였다. 당시 류학생들 가운데서 일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이 세 학과시험에 통과된 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선진과학을 더 많이 배우기 위해 그는 또 모스크바대학 상미분방정리론 토론반과 쏘련과학원 수학연구소 최적통제리론 토론반에도 적극 참가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그는 2년 남짓한 모스크바대학에서의 연구생활을 접고 1966년에 수학연구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문화대혁명>이란 12급 태풍은 나젊은 한경청 교수에게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세상물정과 정치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학자였던 그는 단지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이른바 <조선수정주의집단>사건에 말려들어 2년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다. 희망찬 앞날이라곤 보이지 않는 당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게 그지없이 괴롭고 슬프기만 했다. 과학일군이 과학연구를 하지 못하고 서야 무슨 삶의 의미가 있단말인가! 그래서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문득 동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북에 갔다가 북경으로 돌아올 때 렬차에 짐 보따리를 가득 실어주고 렬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플랫폼에 서 있던 안해와 어린 세 자식들의 모습이 그의 머리속을 꽉 채웠다. 만약 여기서 생을 마감한다면 멀리 있는 남편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쓰는 안해는 어린 애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가? 가족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2년이 지나 죄명을 벗었지만 조직에서는 또 그를 <5.7간부학교>로 로동개조를 보냈다. 거기서 날마다 힘든 로동만 해야 했다. 팔다리 힘은 억세여 가는데 머리는 하루하루 녹쓸어가고 배운 지식은 잊혀져만 갔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과학자 앞에서 무정한 세월은 바람같이 흘러가버렸다.

    <5.7간부학교>에서 연구소로 돌아왔지만 <문화대혁명>의 여운이 여전히 남아있어 연구소에서는 줄곧 한경청 교수를 믿어주지 않았다. 극도로 실망한 그는 연구소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선 과학의 전당이 지금은 지옥같이 느껴졌다. 과학을 연구하지 않는 과학원이 무슨 과학원이고 과학을 연구하지 않는 과학자가 무슨 과학자인가! 그는 가족한테로 돌아가려고 했다. 우선 길림대학과 연변대학에 련계하니 조선족 지식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할수 없이 안해가 있는 통화시로 인사서류를 보냈더니 <조선수정주의 집단사건> 관련서류를 보고는 거절했다.

    그 시기 학력이 높을수록, 능력이 강할수록, 성과가 클수록 더 큰 모욕과 배척을 받았다. 한경청 교수는 벼랑끝에 이른 심정이였다. 이젠 북경귀신으로 될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북경귀신으로 살아갈것인가? 그가 할수 있는것이란 과학탐구밖에 없다. 지금은 과학인재가 멸시받지만 언젠가는 존중을 받을 때가 꼭 올것이라고 믿으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몇년동안 놓았던 책들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젠 공식도 거의 잊혀진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공부라 어려웠지만 힘든 공부속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기쁨 또한 느낄수 있었다.

    한다면 꼭 해내고야 마는 한경청 교수는 하루를 25시간으로 살았다. 글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오른손 엄지인대가 늘어났고, 또 극기훈련을 하듯 너무 오래동안 책상 앞에 앉아있다보니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그러나 <수정주의분자>라는 모자를 썼던 영향으로 여전히 중요한 연구과제는 차례지지 않았고 국내외 학술연구회의에 참가할 기회도 없었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한경청 교수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4년동안 묵묵히 분투한 그 결실로 <저격문제중의 유도법>이란 저서를 써내 연구소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것이다. 이로써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것인지를 깨닫게 되였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따라 못할것이 없다는 자신감도 얻을수 있었다. 강인한 정신력 외에 힘든 시간을 버텨낼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오직 가고 있는 한길밖에 몰랐던 그의 우직함과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감이였던것 같다. 이러한 우직함이나 책임감은 이후 그의 생활신조가 된듯하다.

    1977년 말, 상해에서 통제리론가회의가 있었다. 한경청 교수는 처음으로 회의에 파견되였다. 둥지에 갇혔던 새가 풀려난 기분이였다. 사실 그번 기회가 한교수에게 날개를 달아준셈이다.

    중국에서 과학자 송건 교수와 한경청 교수가 1962년에 함께 시작한 통제리론연구는 당시만해도 국제선진수준에 이미 이르렀다. 그러나 10년 동란을 겪고 나서 선진국가들과의 격차가 커졌다는것을 이번 회의를 통해 실감한 회의 참가자들은 현대통제리론 강습반을 꾸릴것을 제창하면서 총책임자로 통제리론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한경청 교수를 추천했다.

    한교수는 과학연구일군의 사명감으로 기타 성원들과 함께 전국적인 현대통제리론 강습반을 여러차례나 꾸렸다. 강습반을 꾸린 이상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강의노트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리론연구에 몰두하고, 돌이켜보면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소화해냈을가 할 정도이다.

    아마도 당시 그를 지탱해준 힘은 ‘사명감’과 ‘책임감’이 아니였을가. 우선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칠수 있다는 신바람, 우수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주어진 일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부채질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원동력이 되였을것이다.

    한경청 교수는 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형통제체계리론 구조성방법>이란 자체 연구체계까지 형성했다. 이 <구조성방법>은 1982년부터 중국과학원 연구생원과 중국과학기술대학, 상해교통대학 등 여러 대학교 자동통제학과 연구생 교육과정으로 되였고 국가자연과학기금 중대한 프로젝트인 <중국통제계통 컴퓨터보조설계 소프트웨어시스템> 계산법의 기초로 되였다.

    고생 끝에 락이 온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역경을 이겨내려는 용기가 자존심보다 앞서야만 미래는 열린다. 80년대에 들어서 한경청 교수의 연구사업은 상급의 중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자연과학기금 중대한 프로젝트인 <중국통제계통 컴퓨터보조설계 소프트웨어시스템>의 총책임자로 되여 19개 대학교와 과학기술연구소의 150여명 연구원들을 이끌고 분초를 다투어가며 연구사업을 해나갔다.

    1986년 6월 18일은 한경청 교수가 가장 큰 쾌거를 이룬 날이다. 과학자의 가치를 실현하게 된 긍지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온 성공의 희열이 그를 흥분케했다. 이날, <중국통제계통 컴퓨터보조설계 소프트웨어 시스템> 연구성과가 국가급 감정에 통과되였다. 감정위원회 전문가들은 이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아직 발표된적 없는 독창적인 성과라고 인정했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성과는 인공설계를 컴퓨터로 대체한것으로써 공업과 농업, 과학, 국방 등 제 분야에서 널리 응용될수 있다.

    이 연구성과는 향후 통제계통 컴퓨터보조설계 소프트웨어와 컴퓨터가 상호 결합된 통제리론연구를 진행하는데 토대를 마련해놓았으며 우리 나라 통제리론의 발전과 통제계통 과학연구설계, 교수능력을 추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조직의 지적력량은 서로 나누고 합치고 충돌하면서 더욱 커진다. 한경청 교수는 이렇게 큰 성과를 이룩하게 된것은 모든 연구원들이 마음을 열어 참여하고 지혜와 힘을 모아 노력했기때문이라며 팀 성원들을 격려했다. 작은 시내물이 모여 큰 강을 만들고 넓은 바다를 이룬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 성공하려 하면 아무것도 얻을수 없다. 다른 사람이 성공하도록 돕는것이 결국은 자신의 성공으로 되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였다.

    한경청 교수는 중국인구연구문제에서도 통제학자로서 특수한 기여를 했다. 1983년부터 한경청 교수는 해마다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미국동서방중심의 인구연구활동에 참석하면서 꾸준히 연구한 보람으로 인구 총출산률을 계산하는 <출산기수법>이란 독창적인 방법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 산아제한정책 실시에 독특한 기여를 했다. <출산기수법>은 수학적 사고방법과 처리방법으로 인구문제를 연구한것으로 계산방법이 간단하여 호평을 받았다. 국가산아제한위원회에서는 지금도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말에 그가 쓴 론문 <향후 12년간 중국인구상황에 대한 예측 및 분석>은 우리 나라 산아제한정책 제정에 큰 기여를 했다.

    한경청 교수는 일생에서 거둔 성과중 가장 유용한것으로 80년대 말에 개발한 <자동저항교란통W020110108534388312692.jpg 제기술>을 꼽았다. 이 기술은 통제리론과 실제 통제공정이 서로 어긋난 현상을 연구하는 과정에 개발한것이다. 수학에 의존하던 기존의 연구에서 탈피하여 발생하는 오차를 줄임으로써 현대통제리론이 현실생활에 더 용이하게 응용되도록 한 이 신형의 기술은 우리 나라가 자주적으로 연구개발한것으로써 국내외 통제계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다. 이 기술은 이미 국내, 국제 특허권을 따냈으며 국내 그리고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이 기술을 도입했다. 한경청 교수는 더 많은 분야에서 응용할수 있도록 20여년간의 연구성과를 총화해 저서 <자동저항교란통제기술>를 출판했다.

    한경청 교수는 학문적 연구업적과 국가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전국과학기술대회상, 중국과학원 과학진보 2등상, 국가교육위원회 과학기술진보 2등상, 국방광화과학기술 성과상과 총장비부군대 과학기술진보 2등상, 국가과학기술진보 3등상,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3등상, 국방과학기술위원회 과학기술진보 3등상 등을 수상하고 1992년에 국가인사부의 비준을 거쳐 정부특수수당금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중국계통공정학회 상무리사, 중국계통공정학회 계통리론전문위원회 부주임, 중국계통모조학회 상무리사, 중국계통모조학회 통제계통모조와 CAD전문위원회 주임, 중국자동화학회 통제리론전문위원회 위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상무리사를 역임하고 중국과학기술대학과 흑룡강대학, 연변대학 등 여러 대학교 겸직교수와 <계통과학과 수학>, <정보와 통제>, <통제와 결책>, <계통모조학보> 등 전국성 간행물의 편집사업까지 맡으면서 우리 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우수한 인재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경청 교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면서 수많은 우수한 학도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은 현재 대학교수, 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그리고 창업했거나 기업체에 취직하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교수는 제자들이 각자 일터에서 제 몫을 잘 해내고 여기저기서 잘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 김록송 교수의 말씀이다.

    “현재 시장경제하에서 많은 젊은 교원들은 보수를 따집니다. 그러나 한교수는 아무런 보수도 따지지 않고 다리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전국 각지를 다니며 연구성과를 적극 보급했습니다. 한교수는 진정한 학자이고 참 우수한 분입니다. 너무 일찍 서거하셔서 서운합니다.”

    요즘은 변호사나 의사 등 소위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는 반면 리공계는 기피한다는 말이 많이 들린다. 실제로 연구원은 그다지 월급이 많은것도 아니고 게다가 힘들고 밤낮없이 연구를 해야하기 때문에 갈수록 리공계를 기피한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힘들고 불편한것보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선호할것이다. 그러나 잘 살고 편한것만이 행복의 척도나 인생의 기준은 아니다. 자신이 평생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원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경청 교수는 리공계 위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림 그릴 사람은 그림을 그리게 되여 있고, 과학을 할 사람은 과학을 하게 되여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열심히 자신을 발전시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것이면 조금 힘들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승부를 하라고, 명예와 부를 위한 연구는 성공할수 없으며 자신이 좋아서 연구를 하다 보면 마침내 성공하게 될것이라고 격려했다.

    그의 제자인 중국수학계통과학원 황일 연구원은 이렇게 회억한다.

    “독립적인 사상과 독특한 주장을 갖고 있는 한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죠. 매번 학술토론때면 저희들에게 자유로운 토론공간을 제공해주어 학생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시킵니다. 학술연구면에서나 생활면에서 모두 큰 영향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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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대학 제자들과 함께 

    ‘과학자의 가족은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한평생 실험실과 컴퓨터 앞에 앉아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사는 한교수를 옆에서 말없이 지켜봐준 소중한 가족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만일 든든한 가족이 없었다면 연구생활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을것이라고 했다.

한교수의 안해 배인순 녀사의 말씀이다.

    “영감은 참 고상하고 위대한 분입니다. 이같은 남편을 만나게 된게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영감이 <자동저항교란통제기술>을 연구개발한것은 우리 가문의 영광일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랑이고 나라의 자랑입니다.”

    과학자 가문의 혈통은 후대에도 이어져 한경청 교수의 자녀중 두명이 리공계를 택했다. 그중 맏아들은 과학기술대학 컴퓨터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재직하고 있고, 둘째 딸은 북경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경청 교수는 과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한적이 없었다. 비록 어렵고 힘든 시절이 있었지만 언제나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했다. 일생을 오로지 순수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며 우리 나라 과학기술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조선족 과학자 한경청 교수는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를 한껏 빛내였다.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 김록송 교수의 말씀이다.

    “한교수는 제가 1963년 대학 졸업후에 만난 수백명 조선족 학자중 한분이고 우리 민족의 가장 우수한 학자들중의 한분으로서 자랑할만합니다. 그는 선혈들의 혁명정신을 이어받고 후대양성에 줄곧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민족 애착심이 강합니다. 그는 과학연구에 몰두해 큰 성과를 이룩했는데요, 우리 민족 젊은 세대들중에서 한교수와 같은 우수한 인재가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한경청 교수는 2008년 4월 21일 뇌혈전으로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만의 독특한 사랑과 열정을 통제리론연구에 바치고 유명을 달리했다. 한경청, 그의 삶에는 멋이, 그의 꿈에는 빛이, 그리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향기가 남아있다.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최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