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천촌구역에 들어서면 물의 고장 강남땅에 들어선듯 풍경부터 이색적이다. 동쪽 산굽이를 W020121102366255671856.jpg 돌아돌아 하늘과 청산을 한몸에 품은 천연늪이 잇달아 펼쳐지고 꿩들이 끼룩끼룩 울며 호반을 시름없이 날아옌다. 가을철이라 여름철 한때 호심을 아름답게 수놓는 홍련과 호수가에 지천으로 피여나는 해당화를 볼수 없어 심히 아쉬울뿐이다.

    서쪽에 눈을 주면 일사천리로 내달려온 두만강이 목적지 바다를 앞두고 한쉼 쉬려는듯 가을해볕에 흰빛을 번뜩이며 배포가 유하게 흐름을 달리한다. 강물에서 둥둥 떠다니는 고기배와 두만강 상공을 날아예는 백두루미, 갈매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한폭의 수묵화를 방불케 한다.

    방천은 긴 목을 한껏 쳐들고 홰를 치는 수탉을 련상케 하는 중국지도에서 수탉부리의 맨 끝, 중국, 로씨야, 조선의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해있어 중국에서 제일 먼저 아침해살을 받는 지역이다.

    우리를 태운 뻐스는 방천마을에서 동남쪽으로 5킬로메터가량 상거한 "망해각”을 지나 우리 나라 동쪽 땅끝을 표시한 "토자패(土字牌)”앞에 멈춰섰다. 평일인데도 어림잡아 60여명에 달하는 유람객이 "토자패”를 유심히 뜯어보기도 하고 "토자패”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고있었다. 정면에는 "土字牌”란 세 글자가 유표하게 새겨져있었고 측면에는 "光緖12年4月立”(광서 12년 4월에 세움, 1886년)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안겨왔다.

    1885년, 청정부의 명령을 받고 짜리로씨야와 국경선담판을 진행하고 두만강항행권을 되찾은 오대징은 1886년에 오늘 이 자리에 토자패를 세운것이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12층으로 된 망해각에 올랐다. 망해각에 올라서 3국을 둘러보니 가슴이 확 트인다. 동북쪽은 로씨야 하싼구역이요, 서남쪽은 조선의 두만강시이다. 쾌청한 가을날씨라 망원경으로 동쪽을 바라보니 끝없이 펼쳐진 쪽빛바다가 그 위용을 자랑한다. 3국이 손에 잡힐듯 지척에 린접해있으니 항간에서 류행되는 "닭이 울면 3국을 깨우고 개가 짖으면 3국이 놀란다”는 말에 절로 수긍이 간다.

    "장고봉사건전시관”은 방천촌입구서쪽으로 100메터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1938년 7월말 8월초, 일본군과 쏘련군은 장고봉지구에서 대규모군사충돌을 일으켰다. 군사충돌은 두 봉우리를 두고 밀고 당기는 피 말리는 접전을 벌리면서 소규모로부터 점차 대규모로 번졌다. 일본군참가병력은 6814명, 화포 37문이였는데 쏘련군의 땅크 96대, 화포 16문, 비행기 3대를 격파하고 1440명이 사망하는 손실을 입었다. 쏘련군의 참가병력은 1만5000명, 화포 237문, 비행기 250대, 땅크 285대였는데 4071명이 사망하였다.

    최후 쏘련군은 공중과 기계화부대의 우세를 빌어 대규모의 공세를 펼쳐 두개 봉우리를 탈환하고 일본군의 "북침”야망을 단번에 꺾어버렸다. "장고봉사건전시관”에는 도편과 문자 및 실물이 전시되여 당시의 가렬처절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있었다.

 

"동방제1촌”의 새로운 궐기

    청나라 동치년간(同治年間) 조선 경흥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이민들이 방천에 터를 잡았던 당시 이곳은 버들방천이여서 이름을 "버들방천”, "버들목”이라고 불렀다.

    "장고봉사건”이후 일제는 장고봉일대를 금지구역으로 봉하고 "버들방천”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47년부터 다시 촌민들이 모여와 황페했던 마을을 재건하면서 방천(防川)이라고 개명했다.

    전략적요충지에 자리 잡은 방천은 랭전시기에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초진지로, "군사변방”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다가 개혁개방이후 변경지구, 민족지구, 개방지구로 부각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는 2009년, 길림성인민정부에서 방천풍경구를 "길림성 8대경관구”로 지정하면서 방천을 찾는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있는데 올해 국경절기간만도 근 2만명에 달하는 유람객을 접대하였다고 한다.

W020121102366256070562.jpg     방천촌당지부 서기 고춘봉에 따르면 현재 방천촌에는 42호의 농가에 120명의 촌민이 살고있는데 전부 조선족이라고 한다.

    "방천촌에서는 당지의 실정에 근거하여 고기잡이, 농업산업화경영, 민속관광, 로무송출 등 4대 기둥산업을 틀어쥐고 촌의 경제발전을 견인하고있는데 2011년 전 촌의 실제 인당 수입은 1만5000원에 달했습니다."

    2010년 2월, 방천촌에서는 32명의 촌민이 참가하고 어획, 운수, 저장, 판매를 일체화한 "방천어업농민전문합작사”를 꾸렸는데 매년 연어, 황어, 잉어, 붕어 등 물고기 1.5만킬로그람을 생산, 판매하고있다.

    2011년 3월 방천촌에서는 50만원을 투입하여 농업합작사를 건립하였는데 촌의 전부의 경작지 103헥타르를 농업합작사에서 통일적으로 경작하고 수익을 분배하고있다.

    로무송출, 연해진출 등으로 많은 촌민들이 방천촌을 떠나자 방천촌에서는 빈집을 리용하여 생태민속관광대상을 가동하고있다. 관광성수기에는 일평균 3백명에 달하는 유람객이 이 촌에 들러 물고기, 산나물 등 당지의 음식을 맞보고 찰떡, 순대, 김치 등 조선족음식만들기체험행사에 참여한다.

    몇년사이, 방천촌에서는 촌집체경제가 장대해지고 국가의 각종 혜택에 힘입어 생태문명촌건설에 주력하여 기꺼운 성과를 거두었다.

    세대마다 84평방메터에 달하는 새 벽돌기와집 42채를 지었으며 600여만원을 투입하여 포장도로 6600평방메터, 배수구 4500메터, 한꺼번에 2000명이 사용할수 있는 상수도도관을 부설하고 수원을 개조하였다. 마을서쪽에 20만그루의 갈매나무를 심고 마을 새 구역에 록화를 했다. 전력망을 개조하고 25개의 가로등을 설치하였으며 집집마다 산뜻한 울타리를 둘렀는데 그 연장길이는 3500메터에 달한다. 또 2000평방메터 되는 문화오락광장을 건설하였는데 조명시설, 건신기자재, 수세식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구전하여 농민들의 여가생활에 편리를 제공해주고있다. 2010년 방천촌은 "길림성위생촌”이란 영예를 획득하였다.

    "3국 국경지대”, "동방제1촌”, "어미지향”, "국가풍경명승구”, "길림성 8대경관구”, "군민공동건설발상지” 등 어림잡아도 대여섯개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방천촌, 천혜의 비경을 품은 방천촌은 갈수록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조국 동북변강의 눈부신 한알의 보석으로 더더욱 빛을 발할것이다.[중앙인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