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ificWar_artwork.jpg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한 이후 1941년에 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태평양과 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영어: Pacific War, 일본어: 太平洋戦争 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이라 한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대동아전쟁(일본어: 大東亜戦争 だいとうあせんそう)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배경

일본과 중국의 충돌
        19세기 말 중국의 혼란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화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1910년) 만주를 제국의 영향권에 넣는 동안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 손문(孫文)이 주도한 제1차 국공합작을 바탕으로 바뀌었다. 소련의 레닌은 국민당을 지원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손문이 1924년 죽은 후, 뒤를 이은 장개석(蔣介石)는 1927년 국민당의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섰다. 위협을 느낀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국제 연맹이 이에 반발하자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중일 전쟁
         1937년 일본이 로구교(盧溝橋)사건을 바탕으로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북경을 점령한 다음, 중화민국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남경대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수도를 내륙도시인 중경으로 이전하고 영국령 버마와 연결되는 루트로 미국과 영국에 무기지원을 받았으며 곳곳에서 중국 게릴라들이 나타나 일본군을 괴롭혔다.특히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의 공격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결국 중일전쟁은 일본의 예상과 달리 장기화된다.

 

일본의 영토 확장
        일본은 중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게다가 미국이 중일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에게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되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석유·고무 등 물자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나 만주 등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은 부족한 자원 충당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이는 석유·고무·철광 등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때, 유럽에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서진, 프랑스를 정복하여 페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 무렵 독일에 일부 영토가 점령당한 프랑스로서는 인도차이나를 도저히 지켜낼 수 없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세력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한다.

        인도차이나 점령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침공하길 원했고, 인도차이나 점령 이후 일본 제국은 동남아시아 지역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41년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수상으로 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 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발발과 전개

 

진주만 기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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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가라앉은 애리조나호


        일본은 석유 수입이 타격을 받자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을 감행한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일본과 미국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제독 등 일본군 수뇌부들은 애초부터 미국과 일본이 산업생산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미국이 유럽 우선 정책에 따라 독일이 휩쓸고 있는 유럽과의 전쟁에 집중하리라 생각했고, 단기결전을 통해 미국에게 치명타를 가하고 서부 태평양 지역을 점령한 뒤 요새화 시키면 독일과의 전쟁이 급한 미국이 휴전 협상을 통해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세력권을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참전여론이 들끓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즉각 일본, 독일,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의 승리와 미국의 반격


        제1차 세계 대전 후 벌어진 전 세계적인 군축(독일과 일본은 군축에 참여하면서 몰래 군비를 키웠다.) 이후에 군사력 부문의 보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미국은 초반에 무척 고전하였다. 필리핀에 배치된 미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해 투항했고 맥아더는 도망치듯 필리핀을 떠났다. 일본은 태평양 함대가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틈을 타서 서태평양 전역의 주요 지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이 전시체제로 본격적으로 돌입하면서 군수물자를 쏟아내기 시작하였고, 미군은 패전을 통해 후진적 전술을 개량시켰다. 게다가 미국은 통신 기술, 레이더 기술 등 전자전 기술이 일본에 비해 우월했고 이 점이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과 일본은 산호해 해전에서 공방전을 벌였고 곧 이어진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5일)에서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과 300기 이상의 비행기와 숙련된 조종사 등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과달카날 전역(1942년 8월 ~ 1943년 2월) 등의 국지적 승리를 기반으로 미국은 역습을 계속하여 전황은 이후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의 패퇴

        이후 1944년의 사이판 상륙, 이오지마 전투(1945년 2월~3월)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 등의 고고도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개시하게 되고 급기야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에 이른다. 한편 8월 9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를 거쳐 조선의 북부까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으며 또 9월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일본을 분할통치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군부는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은 전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이며,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울수 있다고 판단, 항복하기로 마음먹는다.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한 뒤, 이튿날인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였고 이로써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다만 일본 제국의 항복 후인 8월 24일에 쿠릴 열도에 상륙한 소련군과 일본군간에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